잠깐, 벡델초이스가 뭐였더라? 벡델 테스트는 뭐 하는 테스트였지? 보통 영화를 뽑지 않았나...? 🤔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깜빡 잊어버리셨다면. 벼락치기 복습을 도와드릴게요. 벡델초이스는 2020년부터 국내 영화계에서 시행하고 있는 벡델데이 행사의 일환으로, 매 해 개봉한 영화 가운데 성평등과 다양성 지수를 조명하기 위한 일명 '벡델 테스트'를 시행하여 의미있는 작품 10가지를 뽑는 작은 시상식입니다. 그 중 올해부터는 변화하는 콘텐츠 시청 흐름을 반영해 드라마 등 시리즈물 중에서도 추가로 5가지 작품을 선정했어요. 바로 거기에! 오늘의 작품 <구경이>가 뽑혔답니다. 👉🍟벡델초이스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앞서 소개한 영화 두 편들이 첫인상 혹은 끝인상에서 어라, 싶은 여지가 남았었던 것과 반대로, <구경이>야 말로 올해 확신의 웰메이드 여성 서사 중 베스트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과장 조금 보태서 이 드라마에 상을 주기 위해서 벡델초이스 시리즈 5가 생긴 셈이다. 감히 이렇게 평하고 싶은 정도입니다.

일전에 구독자 리퀘스트 특집을 할 때부터 <구경이>를 다루어 달라는 요청이 심심찮게 있어왔어요. 디핑을 만드는 저희🌿🍊도 진작부터 눈여겨보던 작품이기도 하고요. 언제 얘기해 볼까 벼르던 차에, 벡델초이스 네 이놈 잘 걸렸다! 😆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소스는, 아직도! 볼까 말까 고민하시는 분들을 위한 <구경이> 추천... 아니 찬사에 가까울 예정입니다. 그런데, 찬사라 예고해 놓고는 막상 이런 말을 맨 먼저 던지게 되는데요. 사실 이 드라마... 굉장히 뻔한 이야기입니다. (두둥..)

앞서 올해의 웰메이드 여성 서사라는 수식으로 <구경이>를 소개했어요. 그런데, 조심스러운 표현일 수 있지만... 사실 '여성' 서사라 칭하기에 이 드라마의 화면에는 '여성'적인 부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캐릭터 설정이 그렇습니다. 배우 이영애가 연기한 주인공 구경이는 떡진 머리에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꼬질꼬질한 몰골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온라인 게임과 술에 찌들어 사는 일명 게임 폐인인데요. 하지만 일전에는 날카로운 형사였던 경력이 있고, 지금도 자신이 쫓는 단서와 흔적을 발견하면 팟칭-하며 눈을 빛내는 천재적인 탐정... 비스무리한 무언가입니다. 그에 대응되는 또 다른 캐릭터를 한번 볼게요. 소름끼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그 자체지만 왠지 덮어놓고 미워하기 어려운 악역. 죽여야 마땅한 사람만을 죽인다는 나름의 원칙은 있으나, 기본적인 윤리관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인물.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치명적인 결함과 오점 때문에 오히려 캐릭터적인 매력이 배가된 빌런 송이경을, 앳되고 순수한 얼굴의 배우 김혜준이 그야말로 충격적으로 연기했습니다. 오늘 소스의 타이틀 전면에는 이영애 배우의 성함을 걸었지만, 이 드라마의 또 다른 발견이자 최고의 설득력은 바로 그 소위 '맑은(?) 광기'의 악역 연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

괴짜 선역과 매력적인 악역. 게다가 그들 곁에는 묘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따스한 츤데레 조력자도 하나 둘씩 있습니다. (심지어 아주 매력적입니다. 몇몇은 주인공들과 성별이 다르기도 합니다!) <구경이>의 메인 축을 이루는 이 인물간의 대응관계에서 무언가 익숙한 구도가 보이시나요?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오늘날 '영웅' 서사에서 흔히 보이는 캐릭터 빌딩 속 유서 깊은 스테레오타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선과 악 투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스토리의 정 중앙에 선 인물들은 거즘 늘 남성이었습니다. 일례로 <구경이>를 비롯한 많은 탐정 소재 극들이 모티브로 하고 있는 셜록 홈즈 시리즈 속 탐정과 조력자 관계(홈즈-왓슨), 선악의 대립관계(홈즈-모리아티)가 대표적인 도식 중 하나죠. 고전보다는 다면적인 층위에서 선과 악의 경계가 희미해진 캐릭터를 그려내고자 하는 현대적인 이야기들에서도 물론 이 암묵적인 주인공 성별 배분의 약속(?)은 여전한 것 같고요. 방금 문장을 적으며 저는 자연스럽게 영화 <신세계>가 떠올랐는데요. 아끼던 친우가 스파이인 걸 알고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의리를 지키는 조폭, 그리고 그 눈 감은 의리를 이용해 비로소 흑화하는 경찰... 이런 설정의 시놉시스를 받으면 저라도 무의식중에 음, 주연으로는 황정민, 아니아니 중년 남성 배우를 캐스팅해야겠군... 생각하지 싶습니다. 현대의 극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옛날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졌지만, 여전히 '터프한 고난을 딛고 다치며 성장하는 주인공'의 전형으로는 남성 인물의 피규어가 먼저 떠올라요. 머리에 어지간히 힘을 주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감히 말해보자면! 바로 그 전형적인 이야기에다 '머리에 힘을 주어서' 마무리한 작품이 <구경이> 였다고 생각합니다.

<구경이>의 스토리는 사실 어찌보면 조금 뻔해요. 인물의 탄생과 퇴장까지, 우리가 익히 알아 온 '영웅' 서사로 꽉꽉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막연히 '여성 투톱 주연물' 하면 떠올릴만한, 여성이기에 주어지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꿋꿋한 극복과 초월적 승화... 그런 것들은 많지 않고요. 그저 '주인공'과 그 대척점에 있는 '악당'이기에 겪는, '그럴만한' 지지고 볶기가 그려집니다. 이제 그 권선징악의 구조가 21세기적으로 세련되고 위트있게 비틀어 진 정도입니다. 물론 K-드라마만 보아 온 시청자층이라면 무슨 이런 주인공이 다 있어;; 싶을 수도 있었을 것 같긴 한데요. (저랑 같이 드라마를 본 저희 부모님이 그랬습니다. 🤣) 그치만 오늘의 소스를 읽어주시는 대부분의 디핑러라면, 고무고무 루피가 나오는 <원피스> 부터 웬 날백수가 딸기 케익을 퍼먹다 뭔가를 해결하러 뛰어다니는 <은혼>까지 (사족: 은혼은 어릴 적에 보면 안됐었지만..) 어릴 적 보았던 만화 속 설정들이 <구경이>의 몇몇 장면들과 익숙하게 겹쳐 보이실 거라 생각합니다. 혹자는 이를 '기존 소년만화의 도식을 그대로 옮겨와 여성 주연들에게 드디어(!) 선사한 작품'이라 표현하던데요. 이 한 문장에 십분 공감합니다.

이런 지점에서 <구경이>는 꽤 뻔한 이야기입니다. 이 뻔한 걸 했는데 결과물이 뻔하지 않았다는 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들을 시사합니다. 그만큼 '뻔한' 주인공, '뻔한' 서사가 여성의 모습으로 쌓여온 적이 드물었단 사실이에요. 저 또한 오늘의 소스에서 셜록 홈즈부터 은혼까지 제가 n0년간 걸어온 콘텐츠의 근현대사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게도 여성 주연작을 하나도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반성해야 할지, 모두가 뒤돌아 보아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작품들을 우선해서 떠올리려다 생긴 불상사라 저를 변호해 봅니다. 😂 그리고 이 뻔한 내용을 비로소 '뻔뻔하게' 가능케 해준 <구경이>의 제작진들, 이런 뻔뻔한 드라마가 OTT가 아닌 지상파 전파를 탈 수 있게 만들어 준 이영애라는 배우의 선택(!)에 새삼스런 경의와 감사 또한 표해 봅니다.

서두에서 했던 말을 다시 돌이켜 보면서 글을 맺을게요. 여성적인 부분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 서사 그 자체일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면서도 어찌 보면 돌고 돌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지요. 근데 어떻게 사람이 밥만 먹나요. 쌀도 먹고 밀도 먹고... 개인의 식경험을 다양하게 만드는 차원에서, 또 건강을 위해서도 노 글루텐이나 두부면 같은 건강한 재료도 먹어보면 좋습니다. 가끔 자극적인 마라탕 같은 것도 먹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보통은 '배가 고파서 맛있는 밥을 먹었다.' 라고 얘기하면 적당히 다 통하지 않나요. <구경이>가 써낸 여성 서사도 앞으로 우리에게 그런 방식으로 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고.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당연히 여성 주인공으로도 가능하지 않나? 이게 없네, 그렇다면 뻔뻔하게 가자! 이러한 매커니즘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뻔-뻔한 세상. '유명 여배우가 출연하는 이상한 드라마'가 아닌 '특이하고 재밌는 하드보일드 코믹 탐정극' 이라는 일반적인 수사 하나로 모두를 끄덕거리게 하는. 여성 서사가 더 이상 여성 서사로서 돋보이지 않는 뻔-한 세상. 조금씩 더 가까워질 수 있겠죠? 한 발짝 더 나아간 뻔뻔한 자취를 통해서 바라봅니다.